[제주서북교회연합회] 욕망의 기능 | 삶에서 염려가 떠나지 않는 구조
Update: 2025-11-07
Description
유튜브 영상에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제주서북교회연합회 목회자 일행이 우리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거기에서 전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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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의 기능 | 삶에서 염려가 떠나지 않는 구조
· 염려하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려면
· 갈.5,16~17, 마.6,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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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인간의 본질: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대한 통찰
본 문서는 인간을 동물과 구별 짓는 핵심 특성인 '상상력'의 이중적 본질을 탐구하고, 이것이 인간의 불안과 욕망, 그리고 궁극적인 삶의 방향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상상력은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었으나, 동시에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라는 고유한 고통을 낳았다. 이 불안을 해소하려는 시도는 종교의 탄생으로 이어졌으며, 더 나은 내일을 향한 기대는 '욕망'을 발동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성경적 관점에서 욕망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육체(σάρξ)에 기반한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인 '에피뒤미아(ἐπιθυμία)'이며, 둘째는 본질적 자아에서 비롯된 이성적이고 결단적인 의지인 '델레마(θέλημα)'이다. 많은 이들이 육체의 요구인 '에피뒤미아'를 자신의 진정한 욕망으로 착각하며 살아가지만, 이는 결국 육체의 죽음과 함께 허무로 돌아간다. 진정한 삶은 자신의 본질, 즉 '영(πνεῦμα)'을 따라 '델레마'를 추구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예수는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라며, 상상 속의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라는 존재의 자리에 집중할 것을 가르친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오직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현재를 살아감으로써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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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 차이: 상상력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상상력'이다. 생물학적으로 포유동물에 속하는 인간이 끊임없는 발전과 변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상상력의 힘 덕분이다.
* 동물의 한계: 동물은 상상력이 부재하여 수천 년 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이들은 극심한 굶주림을 겪으면서도 씨앗을 심어 농사를 짓는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며, 감의 단맛을 알더라도 씨앗을 심어 지속적인 결실을 얻는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동물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어 죽는 삶을 반복한다.
* 인간의 능력: 인간은 상상력을 통해 내일을 생각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맛있는 감을 계속 먹기 위해 감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모습을 상상하고,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과자를 만들어내는 등 식품을 가공하고 세상을 발전시켜왔다.
2. 상상력의 이중성: 불안과 종교의 탄생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상상력은 동시에 동물에게는 없는 고유한 고통, 즉 '불안'을 야기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 불안의 기원: 쇠렌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불안이 '자유의 가능성'에서 온다고 보았다. 노르웨이의 '트롤통가(트롤의 혀)' 절벽 끝에 섰을 때 느끼는 불안은, 그곳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다는 '선택의 자유'와 그 가능성을 상상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상상력이 없는 동물(예: 아이벡스)은 절벽을 두려움 없이 오르내린다.
* 종교의 탄생: 끊임없이 지속되는 불안은 인간으로 하여금 현재의 삶을 넘어선 다른 세계, 즉 '영원의 세계'를 상상하게 만드는 보상 기제로 작용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후 세계를 실제 하는 것처럼 이해하려는 시도가 바로 '종교'의 시작이었다.
3. 내일에 대한 염려와 예수의 처방
인간은 죽음을 포함한 미래의 일을 상상하기에 필연적으로 염려하며 살아간다. 이에 대해 예수는 다음과 같은 처방을 제시한다.
* 염려의 본질: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과 달리 인간은 내일을 상상하는 능력을 지녔기에 염려하지 않을 방법이 현실적으로 없다. (마태복음 6:25-30)
* 예수의 가르침 (마태복음 6:34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 원문 분석: 원문인 헬라어 ‘αὔριον μεριμνήσει αὑτῆς(아우리온 메림네세이 아우테스)’는 '내일이 그 자신을 염려할 것이다'라는 의미다. 이는 염려가 나의 몫이 아니라 '내일' 그 자체의 몫임을 명확히 하며, 인간은 오직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
4. 성경적 관점에서의 두 가지 욕망
미래에 대한 상상력은 '욕망'을 발동시켜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욕망이 사라진 상태는 우울증과 같이 삶의 이유를 상실하게 만들지만, 과도한 욕망은 불행을 낳는다. 성경(갈라디아서 5:16-17)은 욕망을 두 가지 유형으로 명확히 구분한다.
에피뒤미아 (ἐπιθυμία):
육체의 소욕(所欲), 욕심, 정욕, 욕망의 주체, 살덩이 (σάρξ, 사르크스)
특성 감각적, 본능적, 충동적, 즉흥적 이성적, 나와 상관없이 육체가 기계적으로 원하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자신의 진정한 욕망으로 착각한다.
델레마 (θέλημα):
나의 본질 (자아, 영) 결단적 의지, 마음의 방향, 나의 의지에 따라 본질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뜻'이나 '의지'로 번역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본질적 욕망인 '델레마'가 작동하기 전에 육체의 욕망인 '에피뒤미아'를 먼저 경험하고, 이를 삶의 의미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육체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며, '에피뒤미아'를 동력으로 삼았던 삶은 모두 허사로 돌아간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5. '영(πνεῦμα)'의 재해석과 본질적 자아
갈라디아서 5장 16절의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구절은 원문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구한다.
* 원문과 번역의 차이: 원문은 'πνεύματι περιπατεῖτε(프뉴마티 페리파테이테)', 즉 '영을 따라 행하라'는 의미다. '성령'을 의미하려면 '거룩한(ἅγιος)'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πνεῦμα ἅγιον(프뉴마 하기온)'이 되어야 한다.
* '영(πνεῦμα)'의 의미: 여기서 '영'은 번역자의 관념에 따른 '성령'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나 자신의 본질'을 의미한다. 즉, "영을 따라 행하라"는 것은 육체의 요구가 아닌, 자신의 본질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델레마')을 따르라는 명령이다.
* 사례: 누가복음 8장 2절의 '악귀(惡鬼)'는 원문에서 '악한 영(πνεῦμα πονηρόν)'으로, '영(πνεῦμα)'이 항상 '성령'을 의미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6. 궁극적 지향점: '지금 여기'의 삶
인간이 육체적 한계를 넘어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는 '에피뒤미아'를 따르는 삶에서 벗어나 '델레마'를 추구하는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는 마치 과학계에서 리사 랜들 교수가 주장한 '여분의 차원'처럼, 우리가 아는 육체의 삶이 전부가 아닐 가능성을 신뢰하는 것과 같다.
* 하나님에 대한 신뢰: 예수는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32 )고 말하며, 인간의 상상에 기반한 미래 계획보다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할 것을 촉구한다.
* 삶의 자리: 삶의 자리는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내일'이 아니라, 언제나 '지금 여기'이다. 상상 속의 미래를 믿는 대신, 현재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
* 구해야 할 것: 우리가 구할 것은 단 한 가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마태복음 6:33 )이다.
* 최고의 가치: 삶의 최고 가치는 '무엇이 옳은가'를 판단하는 것이다. 예수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태복음 5:37 )고 가르쳤다. 내일에 대한 계산과 상상이 개입할 때, 이러한 단순하고 명확한 판단이 흐려진다.
결론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나타나실지를 구하며,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명확하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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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com/@moon.moks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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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서 전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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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려하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려면
· 갈.5,16~17, 마.6,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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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인간의 본질: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대한 통찰
본 문서는 인간을 동물과 구별 짓는 핵심 특성인 '상상력'의 이중적 본질을 탐구하고, 이것이 인간의 불안과 욕망, 그리고 궁극적인 삶의 방향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상상력은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었으나, 동시에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라는 고유한 고통을 낳았다. 이 불안을 해소하려는 시도는 종교의 탄생으로 이어졌으며, 더 나은 내일을 향한 기대는 '욕망'을 발동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성경적 관점에서 욕망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육체(σάρξ)에 기반한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인 '에피뒤미아(ἐπιθυμία)'이며, 둘째는 본질적 자아에서 비롯된 이성적이고 결단적인 의지인 '델레마(θέλημα)'이다. 많은 이들이 육체의 요구인 '에피뒤미아'를 자신의 진정한 욕망으로 착각하며 살아가지만, 이는 결국 육체의 죽음과 함께 허무로 돌아간다. 진정한 삶은 자신의 본질, 즉 '영(πνεῦμα)'을 따라 '델레마'를 추구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예수는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라며, 상상 속의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라는 존재의 자리에 집중할 것을 가르친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오직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현재를 살아감으로써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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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 차이: 상상력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상상력'이다. 생물학적으로 포유동물에 속하는 인간이 끊임없는 발전과 변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상상력의 힘 덕분이다.
* 동물의 한계: 동물은 상상력이 부재하여 수천 년 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이들은 극심한 굶주림을 겪으면서도 씨앗을 심어 농사를 짓는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며, 감의 단맛을 알더라도 씨앗을 심어 지속적인 결실을 얻는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동물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어 죽는 삶을 반복한다.
* 인간의 능력: 인간은 상상력을 통해 내일을 생각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맛있는 감을 계속 먹기 위해 감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모습을 상상하고,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과자를 만들어내는 등 식품을 가공하고 세상을 발전시켜왔다.
2. 상상력의 이중성: 불안과 종교의 탄생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상상력은 동시에 동물에게는 없는 고유한 고통, 즉 '불안'을 야기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 불안의 기원: 쇠렌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불안이 '자유의 가능성'에서 온다고 보았다. 노르웨이의 '트롤통가(트롤의 혀)' 절벽 끝에 섰을 때 느끼는 불안은, 그곳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다는 '선택의 자유'와 그 가능성을 상상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상상력이 없는 동물(예: 아이벡스)은 절벽을 두려움 없이 오르내린다.
* 종교의 탄생: 끊임없이 지속되는 불안은 인간으로 하여금 현재의 삶을 넘어선 다른 세계, 즉 '영원의 세계'를 상상하게 만드는 보상 기제로 작용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후 세계를 실제 하는 것처럼 이해하려는 시도가 바로 '종교'의 시작이었다.
3. 내일에 대한 염려와 예수의 처방
인간은 죽음을 포함한 미래의 일을 상상하기에 필연적으로 염려하며 살아간다. 이에 대해 예수는 다음과 같은 처방을 제시한다.
* 염려의 본질: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과 달리 인간은 내일을 상상하는 능력을 지녔기에 염려하지 않을 방법이 현실적으로 없다. (마태복음 6:25-30)
* 예수의 가르침 (마태복음 6:34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 원문 분석: 원문인 헬라어 ‘αὔριον μεριμνήσει αὑτῆς(아우리온 메림네세이 아우테스)’는 '내일이 그 자신을 염려할 것이다'라는 의미다. 이는 염려가 나의 몫이 아니라 '내일' 그 자체의 몫임을 명확히 하며, 인간은 오직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
4. 성경적 관점에서의 두 가지 욕망
미래에 대한 상상력은 '욕망'을 발동시켜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욕망이 사라진 상태는 우울증과 같이 삶의 이유를 상실하게 만들지만, 과도한 욕망은 불행을 낳는다. 성경(갈라디아서 5:16-17)은 욕망을 두 가지 유형으로 명확히 구분한다.
에피뒤미아 (ἐπιθυμία):
육체의 소욕(所欲), 욕심, 정욕, 욕망의 주체, 살덩이 (σάρξ, 사르크스)
특성 감각적, 본능적, 충동적, 즉흥적 이성적, 나와 상관없이 육체가 기계적으로 원하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자신의 진정한 욕망으로 착각한다.
델레마 (θέλημα):
나의 본질 (자아, 영) 결단적 의지, 마음의 방향, 나의 의지에 따라 본질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뜻'이나 '의지'로 번역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본질적 욕망인 '델레마'가 작동하기 전에 육체의 욕망인 '에피뒤미아'를 먼저 경험하고, 이를 삶의 의미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육체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며, '에피뒤미아'를 동력으로 삼았던 삶은 모두 허사로 돌아간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5. '영(πνεῦμα)'의 재해석과 본질적 자아
갈라디아서 5장 16절의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구절은 원문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구한다.
* 원문과 번역의 차이: 원문은 'πνεύματι περιπατεῖτε(프뉴마티 페리파테이테)', 즉 '영을 따라 행하라'는 의미다. '성령'을 의미하려면 '거룩한(ἅγιος)'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πνεῦμα ἅγιον(프뉴마 하기온)'이 되어야 한다.
* '영(πνεῦμα)'의 의미: 여기서 '영'은 번역자의 관념에 따른 '성령'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나 자신의 본질'을 의미한다. 즉, "영을 따라 행하라"는 것은 육체의 요구가 아닌, 자신의 본질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델레마')을 따르라는 명령이다.
* 사례: 누가복음 8장 2절의 '악귀(惡鬼)'는 원문에서 '악한 영(πνεῦμα πονηρόν)'으로, '영(πνεῦμα)'이 항상 '성령'을 의미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6. 궁극적 지향점: '지금 여기'의 삶
인간이 육체적 한계를 넘어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는 '에피뒤미아'를 따르는 삶에서 벗어나 '델레마'를 추구하는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는 마치 과학계에서 리사 랜들 교수가 주장한 '여분의 차원'처럼, 우리가 아는 육체의 삶이 전부가 아닐 가능성을 신뢰하는 것과 같다.
* 하나님에 대한 신뢰: 예수는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32 )고 말하며, 인간의 상상에 기반한 미래 계획보다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할 것을 촉구한다.
* 삶의 자리: 삶의 자리는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내일'이 아니라, 언제나 '지금 여기'이다. 상상 속의 미래를 믿는 대신, 현재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
* 구해야 할 것: 우리가 구할 것은 단 한 가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마태복음 6:33 )이다.
* 최고의 가치: 삶의 최고 가치는 '무엇이 옳은가'를 판단하는 것이다. 예수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태복음 5:37 )고 가르쳤다. 내일에 대한 계산과 상상이 개입할 때, 이러한 단순하고 명확한 판단이 흐려진다.
결론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나타나실지를 구하며,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명확하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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